1. 우선 일본에 의한 경제 발전이 당시 조선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 일본은 대동아 공영권을 주창하며 조선은 물론 아시아와 더 나아가 세계를 먹을 욕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본의 대륙에 대한 야망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정명가도에서도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있겠죠.
그런 일본의 지도자들의 주 관점과 타겟은 '정복'이었지 자신들보다 덜 부유하던 조선의 '복지'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일본이 한국에 건설한 다리나 공업시설들을 한번 분석해 볼까요?
일본은 고도의 효율적인 신속한 군사작전의 전개를 위하여 한반도내의 교통망은 아주 튼튼하게 만들었습니다.
군수물자들을 실어 옮겨야 하고 2차대전 당시 미군에서도 운용예가 있듯이 기차로 견인하는 400mm 견인포도 당시 세계적으로 제법 알려져 여러 군사 장비와 물자 그리고 인력을 수송함에 있어 그 하중을 지지하고 또 폭격등에도 그 피해가 최소화 되게 끔 튼튼하게 지었지요.
한국민들이 편히 다니라고 지은게 아니라 한국민들을 강제 동원하여 그들의 목숨을 담보로 강행된 토목 및 건축 공사들은
일본 제국주의의 야욕을 위한 것이 었을 따름입니다. 광복후에 한국전쟁 후에도 남은 그 길을 우리가 일부 사용하는 것으로 일본이 우리에게 덕을 베푼것이라 한다면 그것은 문제의 논점이 아닌 부수 효과만을 짚은 자의적인 해석입니다.
이제 공업시설을 알아보죠.
일본은 북한 지역에 많은 공장과 발전소를 세웠습니다. 광복 후 한국전쟁이 발발이 가까워질무렵 북한에서 송전해 주던 전기를 자주 끊어버려 경기/강원도는 툭하면 어두운 밤을 지새우는 적이 많았습니다. 북한에 그런 공업단지가 세워지고 그런 공업단지들을 유지하기 위한 발전 시설들이 세워진것은 군수 물자와 무기를 생산하여 최전선인 중국으로 곧바로 수송을 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북한은 남한지역에 비하여 광물자원이 풍부했으니까요.
지빵고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18세기 무렵까지 서양인들이 아시아 어딘가에 있다는 금(Gold)의 나라를 지칭하는 일반 명사였습니다. 이것이 포르투갈 상인들과의 교류를 시작으로 개방을 한 일본이 자신들이라며 세계에 광고를 하였죠. 하지만 열도에는 금이 없습니다. 많은 이들이 모르고 있지만 한국은 금광이었습니다. 저희 할아버지가 운영하시다가 폐광이 되어 두산에 판 금강광산에서도 2001년에 금맥이 발견되었습니다. 19세기,20세기 초반까지 명성황후가 있던 그 무렵 전부터하여 한국은 열강들의 자원의 수탈 1호 대상이었습니다. 러시아는 목재, 미국은 금... 이었던 것 같군요. 한 7-8개국의 주요 수탈품을 고등학교때 국사 교과서에서 왼쪽 페이지 한면 전체에 그림으로 가득차 있는것을 본 기억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특히 일본은 보리고개로 고생하던 우리 증조 고조 할아버지 세대들의 목숨과도 같던 쌀을
아주 헐값에 일본에 가져가서 일본내 쌀 시세를 맞추고 조절하는데 쓰고
전쟁에 접어들면서는 엄청난 양을 강제로 빼앗아갔죠.
그처럼 지빵고였던 한국은 목재는 물론, 군사주요무기인 텅스텐부터 석탄 그리고 금에 이르기까지 심지어는 문화재와 고서적들까지도 많이 약탈이 되었고 일본은 그것을 극대화 하기 위하여 북한에 공단을 만든것입니다. 오히려 박통때 대일 손배 청구에 당시 광물 자원들이 들어있지 않은 것이 저는 너무나 의아할정도 입니다.
또 일본이 패망 후 물러가며 남긴 공장들은 전혀 한국인들이 운영할 수 없었습니다. 군수물자를 위해 경공업 관련 시설들도 제법있었지만 일본은 절대 조선인에게 기술직을 인사배치한 적이 없습니다. 특히나 주요부품들과 핵심기술서, 품질 관리 공정 규격 및 메뉴얼들까지 모두 일본에 가져감으로 인해 한국민들에게 고철 수거 및 폐 건축물 철거 부담만 가중시켰을 뿐입니다.
60년대에 삼성 이병철 초대 회장이 설탕 공장을 짓기위하여 일본에서 유학한 한국인 대학교수와
(그 당시엔 교수가 참 드물어 교수라면 그 당시 최고의 엘리트입니다.)
일본내의 인맥을 총동원하여 일본에서 공수한 설탕 공장의 기계들을 조립만 하였음에도
초기에 엄청난 시행착오를 겪었던 나라가 불과 30-40년후에 반도체 대국이 된것을 보면
한국의 경제성장은 맨땅에 헤딩한 우리 할아버지 부모님 세대의 노력과 지혜라고 밖에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특히 일본이 남겨놓고간 시설들의 상당수가 한국전쟁때 파괴되었다는 점을 다시 한번 밝힙니다.
2. 일본은 한국에 문화를 알렸다?
한국에만 있는 한자로 논 답자가 있습니다.
일본식 한자 표기로는 기합을 준다할때의 '기합'과 가족이 아닌 '식구'가 있습니다. 또 한가지 '문화'라는 표현도 일본에 의해 많이 들어왔다는 것이 학자들사이에 공감대가 이루어지는 부분입니다. 한단고기라는 책에 '문화'라는 표현이 있어 한국내 정통 사학자들이 한단고기는 후세에 쓰여진 위서라고 할 정도이니까요.
뭐 아무튼 이 문화라는 것이...
우선 노래를 예를 들어보죠. 한국은 뽕짝(트로트), 일본은 엔카가 있습니다. 이 둘은 거의 동시대에 나타나서 서로 영향을 주며 발전한 것이라고 중앙대학교 음대 노동은 교수님께 직접 세미나를 들어 알고 있습니다. 마치 고구려 멸망 이후에 펴라성(평양)의 귀족 문화를 흡수한 당나라가 그때부터 점점 문화를 꽃피웠던 사실도 여기에 어느정도 부합하리라 봅니다. 뭐 그럼 대중 가요의 경우 우리가 도움을 줬으면 줬지 그 형성에 한수 배운것은 아닐테구요.
내선일체나 신사참배나 칼을 차고 교사가 교실에서 어린 학생을 가르치는 것이나
일왕을 위해 죽으라며 가미가제로 인간성을 말살하며 전장에 내미는 것이나
자신의 역사를 잊으라며 강제 창씨개명을 하고 한국 고대사를 축소 시켜 한국민에게 가르치는 것이나
뭐... 정상적인 '문화'라고 할만한 것은 없는것 같군요.
3. 식민지배가 불가피 했다면 차라리 일본이 나았다?
정말 앞뒤 없는 이야기입니다. 이말을 하기 위해서는 식민지를 거느렸던 열강들의 예를 좀 더 자세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칭을 가졌던 것은 세계 도처에 식민지를 거느렸기 때문이죠.
한때 전세계 절반이 넘는 곳에서 영국의 깃발이 휘날렸으니까요.
영국을 보면, 우선 그들이 지나친 백호주의로 인하여 식민지 사람들을 회유하거나 사상을 고치지 않고
식민지의 유색 인종들을 단순히 일만 시키는 것으로 간주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영국은 그 어떤 몰상식한 비인간적인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경우에 따라 가혹할 지언정 일제처럼 비참하고 비극적이진 않았습니다.
그래서 영국이 자신들이 식민 지배를 하여 세계를 경영 했던 것을 자부심을 가지고
식민 지배를 받았던 나라들도 영국을 여왕님의 나라 어머니의 나라라고 부름에도
그 어떤 사회학자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것입니다.
영국은 자국의 빈약한 자원과 생산시스템을 자신들의 고부가가치 상품인 목화등을 이용하여 식민지와
한쪽에 불리한 거래를 하며 무역을 통한 엄청난 이익과 경우에 따라 강제 노역을 부가하였지만
일본처럼 사상을 개조하고 고문하고 왕후를 산채로 죽여 그 시체를 불태우거나
마루타 실험 부대를 만들어 마취가 안된 산모의 배를 갈라 (자궁쪽이 아닌) 태아를 받는 등등의
상상으로만 가능한 모든 외과술을 시행하고 기록을 남겨 자신들의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기법을 최대한 익혔기에
전후 일본의 외과술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지금도 상당한 실력을 자랑하는 그런 짓을
그런 말도 되지 않는, 역사책에 남겨서 국적을 떠나 우리 인류의 그 어떤 후손들에게도 차마 보이지 못할 그런짓을
영국은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중국이 식민지배를 했다면 중국의 역대 제국들의 경영 방침에 따라 중원은 본국이고 나머지는 조공을 바치는 각자 그 지역의
통치 시스템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가지 않았을까 합니다. 마치 광개토 대왕이 십제의 아신왕을 바로 앞에 무릎 꿇려 항복 문서를 받아 내고 신라를 완전한 속국으로 삼아 신라를 치던 기마 문명의 가야를 고구려 정예 4만 보기군으로 단숨에 무력화 시켰던것 처럼 정벌은 물론 정복은 했으되 그 통치 시스템과 그 지역의 문화를 인정하는 그런 국가 경영 방침이었으리라고 제 개인적인 생각을 해 봅니다.
물론 여기서 차라리 우리가 중국의 속국이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누가 식민 통치를 했어도 과연 일본 제국주의 만큼 벼룩의 간을 빼먹고 실보다 가는 다리까지 구워먹은채 남은 팔과 더듬이로 일을 시켜먹는 짓은 하지 않았을 것 같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비유임을 밝혀둡니다.
4. 왜 역대 정권들마다 일본에게 유감을 표명하는가?
그것은 당연합니다. 한일 협정의 정상적인 처리 문제를 떠나서 한번도 일본이 제대로 된 사죄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유감을 표명했던것은 일본이지요. 제대로 된 사과나 그러한 조취를 취한적이 없습니다.
80, 90년대에 한참 일본의 용어 선택인 유감에 대해 우리 한민족은 한 목소리로 유감을 표명했던 적이 있습니다.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에게 부과된 전쟁비용을 감당하지 못하여 히틀러가 2차대전을 일으켰다고 할 만큼
전쟁으로 인한 피해국의 참상은 말과 글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5. 그럼 왜 이러한 일본을 옹호하는 주장들이 나올 수 있는가?
'누구는 친한파 인사이다.'라는 표현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라인 강의 기적으로 공업 대국이된 독일이 20세기에 전세계의 이공계 우수 인력을 자국에서 무료 교육을 시켰던 것도 미국이 자신들 나라에서 교육 받고 정계에 있는 각국 인사들을 관리하며 자신들의 독자 채널을 구축하는 것도 모두 그 당사자와 그 국가들간의 일종의 암묵적인 계약인것입니다.
한쪽은 그냥 고맙고 배울것이 많은 나라이니 교류를 늘려야 한다. 다른 한쪽은 유능한 자이니 대사관을 통하여 어떠한 형태로도 예의를 표할 필요가 있고 또 능력이 있으니 그냥 무상으로 교육을 시켜주는 것일 뿐이라고는 하지만 과연 세상에 공짜가 어디있을까요?
그 공짜를 가장한 커넥션에서 얻어지는 이익들은 그 똑똑한 인재들의 얼과 역사의식의 결여로 인하여
자신의 나라와 시민들의 유무형의 이득을 해외로 무단 반출시킴으로 가능한 것이며
그러한 행위들의 진행 또는 예정에서 그들간의 계약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완용의 자손들이 엄청난 땅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미군 철수 하고 땅 내놓아라할 그런 시점이 아닙니다.
친일파의 후손들이 땅만 해도 벌써 엄청나게 가져갔는데 대를 이으며 그 숨겨놓은 재산은 또 얼마나 되겠습니까?
과연 그런 이해관계에 있고 또 그런 사람들의 후원으로 성장한 -육체적이건 정계 학계이건- 이들이 과연
우리 빽없고 그다지 물려 받은 것 없는
-심지어 강남의 빌딩을 여러채 보유한 속칭 땅부자의 아들딸들도 그들에 비할바가 못됩니다-
시민들의 입장을 조금이나 고려했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올라온 글을 보고 곧바로 직접 작성한 것이기에 역사적인 비유나 표현에 있어
사실적인 정보나 기록과 차이가 있는 부분이 있다면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
>내가 보기엔 글케 욕 먹을 만한 말은 아닌듯 하구먼..
>우리나라 사람들은 너무 감정적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강하넹...
>사실 당시 우리나라는 내재적 발전 가능성이 높지 않았고
>일본에 의한 강제적인 지배가 없었다면
>지금처럼 발전했을 가능성은 없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한다.
>물론 일본의 강압적인 지배와 한국민 말살적책은 당연히
>맹 비난을 받아야만 하지만. 기타 시스템적인 부분은 이후에도
>상당히 한국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함.
>글고 당시와 같은 힘의시대에 일본에 안 먹혔다면 아마 우리나라
>는 영국이나 러시아 와 같은 동시대 대국에 의해 먹혔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봄.
>나는 일본의 한국지배에 대해 그들의 야만적인 행위등에 대해서는
>규탄을 하나 나머지 시스템적인 부분 및 기간시설 발전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효과도 분명히 있었다고 본다.
>비근한 예로....
>홍콩을 보자.. 홍콩이 만약 영국의 식민지가 아니엇더라면..????
>아마 지금의 홍콩은 없을 것이다. 아마 중국 평균수준의 홍콩이
>존재 하겠지...
>만약 지금 홍콩의 발전이 있었던 이유가 중국의 내제된 역량에 의한
>것이라고 중국인들이 말한다면 객관적 입장에서 우리는 어케 생각할까?
>ㅋㅋ 아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소리라고 할꺼같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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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khuplaza.com 에 올라온 글을 반박한 내 글이다.
- 2005년 3월 7일 -
- 일본은 대동아 공영권을 주창하며 조선은 물론 아시아와 더 나아가 세계를 먹을 욕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본의 대륙에 대한 야망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정명가도에서도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있겠죠.
그런 일본의 지도자들의 주 관점과 타겟은 '정복'이었지 자신들보다 덜 부유하던 조선의 '복지'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일본이 한국에 건설한 다리나 공업시설들을 한번 분석해 볼까요?
일본은 고도의 효율적인 신속한 군사작전의 전개를 위하여 한반도내의 교통망은 아주 튼튼하게 만들었습니다.
군수물자들을 실어 옮겨야 하고 2차대전 당시 미군에서도 운용예가 있듯이 기차로 견인하는 400mm 견인포도 당시 세계적으로 제법 알려져 여러 군사 장비와 물자 그리고 인력을 수송함에 있어 그 하중을 지지하고 또 폭격등에도 그 피해가 최소화 되게 끔 튼튼하게 지었지요.
한국민들이 편히 다니라고 지은게 아니라 한국민들을 강제 동원하여 그들의 목숨을 담보로 강행된 토목 및 건축 공사들은
일본 제국주의의 야욕을 위한 것이 었을 따름입니다. 광복후에 한국전쟁 후에도 남은 그 길을 우리가 일부 사용하는 것으로 일본이 우리에게 덕을 베푼것이라 한다면 그것은 문제의 논점이 아닌 부수 효과만을 짚은 자의적인 해석입니다.
이제 공업시설을 알아보죠.
일본은 북한 지역에 많은 공장과 발전소를 세웠습니다. 광복 후 한국전쟁이 발발이 가까워질무렵 북한에서 송전해 주던 전기를 자주 끊어버려 경기/강원도는 툭하면 어두운 밤을 지새우는 적이 많았습니다. 북한에 그런 공업단지가 세워지고 그런 공업단지들을 유지하기 위한 발전 시설들이 세워진것은 군수 물자와 무기를 생산하여 최전선인 중국으로 곧바로 수송을 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북한은 남한지역에 비하여 광물자원이 풍부했으니까요.
지빵고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18세기 무렵까지 서양인들이 아시아 어딘가에 있다는 금(Gold)의 나라를 지칭하는 일반 명사였습니다. 이것이 포르투갈 상인들과의 교류를 시작으로 개방을 한 일본이 자신들이라며 세계에 광고를 하였죠. 하지만 열도에는 금이 없습니다. 많은 이들이 모르고 있지만 한국은 금광이었습니다. 저희 할아버지가 운영하시다가 폐광이 되어 두산에 판 금강광산에서도 2001년에 금맥이 발견되었습니다. 19세기,20세기 초반까지 명성황후가 있던 그 무렵 전부터하여 한국은 열강들의 자원의 수탈 1호 대상이었습니다. 러시아는 목재, 미국은 금... 이었던 것 같군요. 한 7-8개국의 주요 수탈품을 고등학교때 국사 교과서에서 왼쪽 페이지 한면 전체에 그림으로 가득차 있는것을 본 기억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특히 일본은 보리고개로 고생하던 우리 증조 고조 할아버지 세대들의 목숨과도 같던 쌀을
아주 헐값에 일본에 가져가서 일본내 쌀 시세를 맞추고 조절하는데 쓰고
전쟁에 접어들면서는 엄청난 양을 강제로 빼앗아갔죠.
그처럼 지빵고였던 한국은 목재는 물론, 군사주요무기인 텅스텐부터 석탄 그리고 금에 이르기까지 심지어는 문화재와 고서적들까지도 많이 약탈이 되었고 일본은 그것을 극대화 하기 위하여 북한에 공단을 만든것입니다. 오히려 박통때 대일 손배 청구에 당시 광물 자원들이 들어있지 않은 것이 저는 너무나 의아할정도 입니다.
또 일본이 패망 후 물러가며 남긴 공장들은 전혀 한국인들이 운영할 수 없었습니다. 군수물자를 위해 경공업 관련 시설들도 제법있었지만 일본은 절대 조선인에게 기술직을 인사배치한 적이 없습니다. 특히나 주요부품들과 핵심기술서, 품질 관리 공정 규격 및 메뉴얼들까지 모두 일본에 가져감으로 인해 한국민들에게 고철 수거 및 폐 건축물 철거 부담만 가중시켰을 뿐입니다.
60년대에 삼성 이병철 초대 회장이 설탕 공장을 짓기위하여 일본에서 유학한 한국인 대학교수와
(그 당시엔 교수가 참 드물어 교수라면 그 당시 최고의 엘리트입니다.)
일본내의 인맥을 총동원하여 일본에서 공수한 설탕 공장의 기계들을 조립만 하였음에도
초기에 엄청난 시행착오를 겪었던 나라가 불과 30-40년후에 반도체 대국이 된것을 보면
한국의 경제성장은 맨땅에 헤딩한 우리 할아버지 부모님 세대의 노력과 지혜라고 밖에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특히 일본이 남겨놓고간 시설들의 상당수가 한국전쟁때 파괴되었다는 점을 다시 한번 밝힙니다.
2. 일본은 한국에 문화를 알렸다?
한국에만 있는 한자로 논 답자가 있습니다.
일본식 한자 표기로는 기합을 준다할때의 '기합'과 가족이 아닌 '식구'가 있습니다. 또 한가지 '문화'라는 표현도 일본에 의해 많이 들어왔다는 것이 학자들사이에 공감대가 이루어지는 부분입니다. 한단고기라는 책에 '문화'라는 표현이 있어 한국내 정통 사학자들이 한단고기는 후세에 쓰여진 위서라고 할 정도이니까요.
뭐 아무튼 이 문화라는 것이...
우선 노래를 예를 들어보죠. 한국은 뽕짝(트로트), 일본은 엔카가 있습니다. 이 둘은 거의 동시대에 나타나서 서로 영향을 주며 발전한 것이라고 중앙대학교 음대 노동은 교수님께 직접 세미나를 들어 알고 있습니다. 마치 고구려 멸망 이후에 펴라성(평양)의 귀족 문화를 흡수한 당나라가 그때부터 점점 문화를 꽃피웠던 사실도 여기에 어느정도 부합하리라 봅니다. 뭐 그럼 대중 가요의 경우 우리가 도움을 줬으면 줬지 그 형성에 한수 배운것은 아닐테구요.
내선일체나 신사참배나 칼을 차고 교사가 교실에서 어린 학생을 가르치는 것이나
일왕을 위해 죽으라며 가미가제로 인간성을 말살하며 전장에 내미는 것이나
자신의 역사를 잊으라며 강제 창씨개명을 하고 한국 고대사를 축소 시켜 한국민에게 가르치는 것이나
뭐... 정상적인 '문화'라고 할만한 것은 없는것 같군요.
3. 식민지배가 불가피 했다면 차라리 일본이 나았다?
정말 앞뒤 없는 이야기입니다. 이말을 하기 위해서는 식민지를 거느렸던 열강들의 예를 좀 더 자세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칭을 가졌던 것은 세계 도처에 식민지를 거느렸기 때문이죠.
한때 전세계 절반이 넘는 곳에서 영국의 깃발이 휘날렸으니까요.
영국을 보면, 우선 그들이 지나친 백호주의로 인하여 식민지 사람들을 회유하거나 사상을 고치지 않고
식민지의 유색 인종들을 단순히 일만 시키는 것으로 간주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영국은 그 어떤 몰상식한 비인간적인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경우에 따라 가혹할 지언정 일제처럼 비참하고 비극적이진 않았습니다.
그래서 영국이 자신들이 식민 지배를 하여 세계를 경영 했던 것을 자부심을 가지고
식민 지배를 받았던 나라들도 영국을 여왕님의 나라 어머니의 나라라고 부름에도
그 어떤 사회학자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것입니다.
영국은 자국의 빈약한 자원과 생산시스템을 자신들의 고부가가치 상품인 목화등을 이용하여 식민지와
한쪽에 불리한 거래를 하며 무역을 통한 엄청난 이익과 경우에 따라 강제 노역을 부가하였지만
일본처럼 사상을 개조하고 고문하고 왕후를 산채로 죽여 그 시체를 불태우거나
마루타 실험 부대를 만들어 마취가 안된 산모의 배를 갈라 (자궁쪽이 아닌) 태아를 받는 등등의
상상으로만 가능한 모든 외과술을 시행하고 기록을 남겨 자신들의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기법을 최대한 익혔기에
전후 일본의 외과술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지금도 상당한 실력을 자랑하는 그런 짓을
그런 말도 되지 않는, 역사책에 남겨서 국적을 떠나 우리 인류의 그 어떤 후손들에게도 차마 보이지 못할 그런짓을
영국은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중국이 식민지배를 했다면 중국의 역대 제국들의 경영 방침에 따라 중원은 본국이고 나머지는 조공을 바치는 각자 그 지역의
통치 시스템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가지 않았을까 합니다. 마치 광개토 대왕이 십제의 아신왕을 바로 앞에 무릎 꿇려 항복 문서를 받아 내고 신라를 완전한 속국으로 삼아 신라를 치던 기마 문명의 가야를 고구려 정예 4만 보기군으로 단숨에 무력화 시켰던것 처럼 정벌은 물론 정복은 했으되 그 통치 시스템과 그 지역의 문화를 인정하는 그런 국가 경영 방침이었으리라고 제 개인적인 생각을 해 봅니다.
물론 여기서 차라리 우리가 중국의 속국이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누가 식민 통치를 했어도 과연 일본 제국주의 만큼 벼룩의 간을 빼먹고 실보다 가는 다리까지 구워먹은채 남은 팔과 더듬이로 일을 시켜먹는 짓은 하지 않았을 것 같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비유임을 밝혀둡니다.
4. 왜 역대 정권들마다 일본에게 유감을 표명하는가?
그것은 당연합니다. 한일 협정의 정상적인 처리 문제를 떠나서 한번도 일본이 제대로 된 사죄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유감을 표명했던것은 일본이지요. 제대로 된 사과나 그러한 조취를 취한적이 없습니다.
80, 90년대에 한참 일본의 용어 선택인 유감에 대해 우리 한민족은 한 목소리로 유감을 표명했던 적이 있습니다.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에게 부과된 전쟁비용을 감당하지 못하여 히틀러가 2차대전을 일으켰다고 할 만큼
전쟁으로 인한 피해국의 참상은 말과 글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5. 그럼 왜 이러한 일본을 옹호하는 주장들이 나올 수 있는가?
'누구는 친한파 인사이다.'라는 표현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라인 강의 기적으로 공업 대국이된 독일이 20세기에 전세계의 이공계 우수 인력을 자국에서 무료 교육을 시켰던 것도 미국이 자신들 나라에서 교육 받고 정계에 있는 각국 인사들을 관리하며 자신들의 독자 채널을 구축하는 것도 모두 그 당사자와 그 국가들간의 일종의 암묵적인 계약인것입니다.
한쪽은 그냥 고맙고 배울것이 많은 나라이니 교류를 늘려야 한다. 다른 한쪽은 유능한 자이니 대사관을 통하여 어떠한 형태로도 예의를 표할 필요가 있고 또 능력이 있으니 그냥 무상으로 교육을 시켜주는 것일 뿐이라고는 하지만 과연 세상에 공짜가 어디있을까요?
그 공짜를 가장한 커넥션에서 얻어지는 이익들은 그 똑똑한 인재들의 얼과 역사의식의 결여로 인하여
자신의 나라와 시민들의 유무형의 이득을 해외로 무단 반출시킴으로 가능한 것이며
그러한 행위들의 진행 또는 예정에서 그들간의 계약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완용의 자손들이 엄청난 땅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미군 철수 하고 땅 내놓아라할 그런 시점이 아닙니다.
친일파의 후손들이 땅만 해도 벌써 엄청나게 가져갔는데 대를 이으며 그 숨겨놓은 재산은 또 얼마나 되겠습니까?
과연 그런 이해관계에 있고 또 그런 사람들의 후원으로 성장한 -육체적이건 정계 학계이건- 이들이 과연
우리 빽없고 그다지 물려 받은 것 없는
-심지어 강남의 빌딩을 여러채 보유한 속칭 땅부자의 아들딸들도 그들에 비할바가 못됩니다-
시민들의 입장을 조금이나 고려했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올라온 글을 보고 곧바로 직접 작성한 것이기에 역사적인 비유나 표현에 있어
사실적인 정보나 기록과 차이가 있는 부분이 있다면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
>내가 보기엔 글케 욕 먹을 만한 말은 아닌듯 하구먼..
>우리나라 사람들은 너무 감정적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강하넹...
>사실 당시 우리나라는 내재적 발전 가능성이 높지 않았고
>일본에 의한 강제적인 지배가 없었다면
>지금처럼 발전했을 가능성은 없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한다.
>물론 일본의 강압적인 지배와 한국민 말살적책은 당연히
>맹 비난을 받아야만 하지만. 기타 시스템적인 부분은 이후에도
>상당히 한국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함.
>글고 당시와 같은 힘의시대에 일본에 안 먹혔다면 아마 우리나라
>는 영국이나 러시아 와 같은 동시대 대국에 의해 먹혔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봄.
>나는 일본의 한국지배에 대해 그들의 야만적인 행위등에 대해서는
>규탄을 하나 나머지 시스템적인 부분 및 기간시설 발전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효과도 분명히 있었다고 본다.
>비근한 예로....
>홍콩을 보자.. 홍콩이 만약 영국의 식민지가 아니엇더라면..????
>아마 지금의 홍콩은 없을 것이다. 아마 중국 평균수준의 홍콩이
>존재 하겠지...
>만약 지금 홍콩의 발전이 있었던 이유가 중국의 내제된 역량에 의한
>것이라고 중국인들이 말한다면 객관적 입장에서 우리는 어케 생각할까?
>ㅋㅋ 아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소리라고 할꺼같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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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khuplaza.com 에 올라온 글을 반박한 내 글이다.
- 2005년 3월 7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