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성당다니는 사람들이 부러웠었다. 그들은 고해성사라는 것을 할 수 있으니...
죄지었다. 규칙상으로도 양심상으로도 내 기준에서 그건 분명히 죄였다.
술이나 한잔 하고 싶어 좋아하는 친구(여자다. 남여관계에서 좋아하고 마는 그런관계가 아니다. 말그대로 소중하고 친한 암튼. 괜히 묻지도 않은 소릴.... --aa)에게 전화했다.
술한잔하자고 하니 크게 걱정해주다가 사연을 듣고는 살다보면 그럴수도 있다며 큰일인줄 알고 놀랬다며 별거 아니란듯 말해주었다.
그 일 자체는 별거 아니다. 과정에서 별일이 있었다.
내가 그 일을 하게 되었을때 스스로 나쁜일이란건 알면서도 그 순간에 죄책감이 크게 들지 않았다는것과 하기 싫다고 거절하긴 뭣했지만 최소한 거절하려고 뭔가를 건수를 생각해보지도 않았다는 것이 별일이었다.
'죄사함'이란 있을 수 있을까?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의 세상에서 돌이킬 순 없는거다. 죄사함이란 말은 반성이나 변상, 보상이란 말이 더 맞지 않을까?
한 부모가 자기 자식이 자기 가슴에 못을 박을때마다 마당에 있던 판자에 못을 치게했고 자기를 기쁘게 할때마다 하나씩 빼게 했다. 못이 판자에 더 이상 박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지자 자식은 반성을 하고서 착한 일만 하여 못을 빼나가기 시작했고 언젠가 판자에 못이 하나도 없음을 알았을때 기뻐하다가 순간, 수많은 못자욱들을 보며 부모님께 했던 불효를 생각하며 통곡했다는 우화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여기서 내가 평소에 화두로 삼고 있는것들 중 하나인 '과정'이라는 문제가 대두된다.
고통과 고난을 겪음으로서 인간은 발전할 수 있는것이다.
지금 내 휴대폰 인사말은 '모든것이 성장이다'이다. 웃고 싶은 것이건 울고 싶은것이건 그저그런 것이건 모두 우리 삶은 살찌울 수 있는 것의 다양한 형태라고 생각한다.
초등학교때 삼인행이면 필유아사언이라는 어구를 배운적이 있다. 선생님은 길가는 사람이 셋만 있어도 배울점이 있는 사람이 하나는 있다는 뜻으로 해석을 해주셨지만 난, 세명이 가면 내가 그들의 장점은 거울삼아 배울것이요, 단점은 반성삼아 내가 혹여 그러진 않았나 그럴수 있지 않나 생각하며 몸가짐을 바로해야한단 뜻으로 해석을 했다.
암튼 이런점에서는 모든것이 성장이긴 하지만, 중요한거 한가지는 내가 죄를 저지름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을 성장시키는 말 같지도 않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은 없었으면 한다는 거다.
죄라는 것이 왜 있는지 참 기묘하다. 인간세계에만 있는 것이니깐. 본능적인 삶에선 모성애나 협력 그런 고차원적인 것들이 있긴 하지만 일단 먹고, 성교하고 번식하고 그런 순환 구조속에 사는 자연의 법칙이 있다.
가끔 인간위주의 사고에서 세상만물들은 인간이 고통을 겪으며 성장하는 과정에서의 한낱조연에 지나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하지만 그네들의 나름대로의 고통, 어쩌면 인간이 겪는것 이상의 그것을 생각하면 세상만물이 소중함을 느끼게 된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위한 조연이 아니라 그네들 자신의 삶을 위하고 또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인것처럼.
죄라는, 고통의 일부항목 앞에서 당황스러움을 느낀다.
인류학적인 관점에서 죄라는 특이현상을 떠올리다가 문득 하늘을 바라본다. 45억년전에도 있던 하늘. 그 아래서 그것이 세상의 전부인양 별것도 아닌일을 위하여 죄를 짓는 속절없음과 철없음에 신기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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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앞에 속죄하고 싶지 않다.
내 양심과 나를 이끌어주는 자유의지 앞에 속죄하고
내가 높여놓은 또 다른 방향의 엔트로피 앞에 속죄하고 싶을 뿐이다
나의 자기합리화와 나약함과의 타협을 막기위해서
- 2001년 11월 20일 -
죄지었다. 규칙상으로도 양심상으로도 내 기준에서 그건 분명히 죄였다.
술이나 한잔 하고 싶어 좋아하는 친구(여자다. 남여관계에서 좋아하고 마는 그런관계가 아니다. 말그대로 소중하고 친한 암튼. 괜히 묻지도 않은 소릴.... --aa)에게 전화했다.
술한잔하자고 하니 크게 걱정해주다가 사연을 듣고는 살다보면 그럴수도 있다며 큰일인줄 알고 놀랬다며 별거 아니란듯 말해주었다.
그 일 자체는 별거 아니다. 과정에서 별일이 있었다.
내가 그 일을 하게 되었을때 스스로 나쁜일이란건 알면서도 그 순간에 죄책감이 크게 들지 않았다는것과 하기 싫다고 거절하긴 뭣했지만 최소한 거절하려고 뭔가를 건수를 생각해보지도 않았다는 것이 별일이었다.
'죄사함'이란 있을 수 있을까?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의 세상에서 돌이킬 순 없는거다. 죄사함이란 말은 반성이나 변상, 보상이란 말이 더 맞지 않을까?
한 부모가 자기 자식이 자기 가슴에 못을 박을때마다 마당에 있던 판자에 못을 치게했고 자기를 기쁘게 할때마다 하나씩 빼게 했다. 못이 판자에 더 이상 박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지자 자식은 반성을 하고서 착한 일만 하여 못을 빼나가기 시작했고 언젠가 판자에 못이 하나도 없음을 알았을때 기뻐하다가 순간, 수많은 못자욱들을 보며 부모님께 했던 불효를 생각하며 통곡했다는 우화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여기서 내가 평소에 화두로 삼고 있는것들 중 하나인 '과정'이라는 문제가 대두된다.
고통과 고난을 겪음으로서 인간은 발전할 수 있는것이다.
지금 내 휴대폰 인사말은 '모든것이 성장이다'이다. 웃고 싶은 것이건 울고 싶은것이건 그저그런 것이건 모두 우리 삶은 살찌울 수 있는 것의 다양한 형태라고 생각한다.
초등학교때 삼인행이면 필유아사언이라는 어구를 배운적이 있다. 선생님은 길가는 사람이 셋만 있어도 배울점이 있는 사람이 하나는 있다는 뜻으로 해석을 해주셨지만 난, 세명이 가면 내가 그들의 장점은 거울삼아 배울것이요, 단점은 반성삼아 내가 혹여 그러진 않았나 그럴수 있지 않나 생각하며 몸가짐을 바로해야한단 뜻으로 해석을 했다.
암튼 이런점에서는 모든것이 성장이긴 하지만, 중요한거 한가지는 내가 죄를 저지름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을 성장시키는 말 같지도 않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은 없었으면 한다는 거다.
죄라는 것이 왜 있는지 참 기묘하다. 인간세계에만 있는 것이니깐. 본능적인 삶에선 모성애나 협력 그런 고차원적인 것들이 있긴 하지만 일단 먹고, 성교하고 번식하고 그런 순환 구조속에 사는 자연의 법칙이 있다.
가끔 인간위주의 사고에서 세상만물들은 인간이 고통을 겪으며 성장하는 과정에서의 한낱조연에 지나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하지만 그네들의 나름대로의 고통, 어쩌면 인간이 겪는것 이상의 그것을 생각하면 세상만물이 소중함을 느끼게 된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위한 조연이 아니라 그네들 자신의 삶을 위하고 또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인것처럼.
죄라는, 고통의 일부항목 앞에서 당황스러움을 느낀다.
인류학적인 관점에서 죄라는 특이현상을 떠올리다가 문득 하늘을 바라본다. 45억년전에도 있던 하늘. 그 아래서 그것이 세상의 전부인양 별것도 아닌일을 위하여 죄를 짓는 속절없음과 철없음에 신기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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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앞에 속죄하고 싶지 않다.
내 양심과 나를 이끌어주는 자유의지 앞에 속죄하고
내가 높여놓은 또 다른 방향의 엔트로피 앞에 속죄하고 싶을 뿐이다
나의 자기합리화와 나약함과의 타협을 막기위해서
- 2001년 11월 20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