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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으로 바라본 세상

[영화] 워낭을 울리고 워낭소리에 슬퍼하던 우리들을 기억해야 한다.



둘이서 찾았던 주말 오후 경북 안동의 한 극장. 상영관에는 다양한 연령대의 관객들이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곧 펼쳐진 스크린에서는 익숙한 그러나 다소 어려운 사투리들이 울려퍼졌다. 영화 배경인 봉화의 인근이던 안동에서 삶을 돌아보고 내다보는 순간들을 가질 수 있었다.

우리는 삶을 살면서, '좋은 직장만 가진다면' '복권에 당첨만 된다면' '부유한 집안과 혼인을 맺는다면' '내 주식들이 갑자기 올라 준다면' 같은 또 다른 삶에 대한 꿈을 꾸곤 한다.

그러나 지금의 삶이나 꿈꾸던 또다른 삶 모두 완벽하게 자신의 삶과 사상의 행복과 자유를 보장해주지는 못한다. 그것은 이미 정형화 되고 만들어진 체계 속을 우리가 거닐면서 서로가 서로를 향한 연극무대의 배역과 감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시나리오 작가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영화 워낭소리는, 아름다운 경북 봉화의 영상미나 노부부와 이름도 없던 소를 이어주던 정서만을 그린 독립영화로만 보기에는 이 세상은 그리 여유롭거나 녹록하지 못하다는 것을 일깨워 준 작품이었다.

물가정책에서부터 어린 아이들의 교육제도, 입시제도를 지나서 부모세대들을 옥죄어 오는 금융제도, 부동산 정책과 사회로 진출하려는 젊은 이들에게 다가오는 기업의 채용정책 그리고 국가와 국가간의 전쟁이나 테러의 개시 여부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언제나 우리 삶의 대부분이나 모든 것들이 우리가 속한 집단이나 속하려는 집단에 모두 귀속된 채 그들이 정해가는 시나리오 속에서 연출을 하거나 연출 당하는 삶을 살고 있다.

곱배기로 부어준 소 여물 앞에서 눈물을 흘리던 40년을 함께 해 온 또 하나의 가족을 내다 팔려다가도, 도저히 100만원에는 팔 수 없어 되돌리던 발걸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자동차와 소비재들의 수출을 위해서 경제논리와 WTO에도 위배될 정도의 고차원 적인 FTA를 미국과 체결하느라고 모든 삶을 걸고 있던 힘없는 농민 계층들을 소외시켜 버린 우리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대의라며 작은 것들과 소(小)와 소(牛)를 희생시키고, 실적과 숫자에만 집착해서 핑크빛 전망 만으로 모든 것을 합리화 시키던 우리들의 야만성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가끔 우리에게 지배당하던 일부에게 마음을 주거나 주려고 고민을 하는 척을 하며 제 스스로 낭만적이라는 자아도취를 했었지만, 우리에게 지배당하던 그들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주고 있었다. 마치 우리가 우리들에게 모든 것을 다 바쳐가며 치열하게 살아왔던 것처럼.


                                 2009년 2월 14일 14:16 입력 <CopyRight ⓒ PowerNgine 하대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