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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이름 경희대

농활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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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활 = 농민학생연대활동

학생회를 처음하던때 농활을 농촌봉사활동으로 유인물을 만들었다가

학생회 선후배들은 물론 쿠프라자에서도 정말 몰라서 그렇게 만든것이냐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정말 몰랐다. 그때는...




70년대 후반 경 농활이 처음 시작될 때는

대학생들이 사회변혁운동의 한 중심에서 419와 6월 항쟁을 이끌고 난 다음이었기에

농민분들이 대학생 몇명이서 일 도와드리러 왔다고 하면 빨갱이라고 내쫓기 급급했고,

경찰에 신고가 되거나, 전방지역 농촌에는 군부대에서 출입자체를 막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음맞고 의식있는 농민분들만나서 일이라도 돕게되면

경찰이 옆에와서 일하는 것을 계속지켜보거나 민통선 지역이면 군인들이 옆에 찰싹 붙어

나누는 이야기들을 일일이 메모해가기까지 했다고 한다.



2007년 경기도 연천군에서 진행한 경희대학교 국제캠퍼스 여름농활.

경희대 출신이신 연천군수님의 뜨거운 환영과 각 마을을 찾아가서 농활대원의 격려는 물론

부총장님과 단과대학 학장님들이 직접 찾아오셔서 격려를 해주고 가시고,

각 마을마다 농활대원들에게 마을회관을 내어주고 먹을 것도 챙겨주시고

일요일에는 마을마다 농활대와 농민회, 청년회, 부녀회 등이 함께 마을잔치도 모두 열었다.



하지만 예전에 있던, 십년 이십년전에 있던 농활대의 강한 규율이나 끈끈한 연대활동들 보다는

농촌일손만 도와드리고 오는 봉사활동과 대학생들의 MT 같은 성격이 매년 강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인지 총학생회의 잘못인지 아직은 모르겠다.



한미 FTA가 체결되고 정부는 농업을 점차적으로 줄이기위해

농업을 포기할 경우 지원금을 주겠다고 대놓고 농촌을 떠나라고 외치고 있다.

다자간 협상체제인 WTO도 위험하다고 했던 마당에

양자간 협상인 FTA를 그것도 미국과 거의 처음으로 맺다니 대책이 없다.

식량주권과 농촌이라는 계층 보호에 있어서 그동안 한국 민중의 역사를 이끌어왔던 대학생들이

고작 농활이라는 도구로만 '농촌수호'라는 단어를 써도 되는 것인지

그리고 대학생들이, 이 사회를 이끌 대학생들이 이 시국을 알고나 있는지는 막막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