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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속의 창

[사설] 자살과 집회로 얼룩진 오늘을 버리는 '선택'


무언가에 끊임없이 쫓기고, 요구받는 현대인.
무언가를 자신 능력의 120%를 발휘하여 해내지만 돌아오는 것은 880%나 남은 압박.
이 시대 절실하면서도 당연한 가치관에 대한 갈망을 사설에 실어보내고자 한다.

2009. 05. 04 하 대현 기자 ⓒ PowerNgine


       청소년 경제활동참가율 사상 최저…20대 사망원인 1위 '자살'  뉴시스 | 이진례 | 입력 2009.05.04 12:04
       "실업자 이달 100만 명 돌파할 듯"  입력시각 : 2009-05-04 11:35 YTN
       "'노동절ㆍ촛불' 과잉진압" 규탄(종합) 경찰, "과도한 인권침해" 반발 (서울=연합뉴스) 김남권 기자


세상이 들끓고 있다. 개인적인 어려움에서 자살을 하는 것에서부터 경제난과 사회적 압박에서 오는 자살까지.
그리고 자신의 내면에서만 끝나는 자살이 아닌, 사회와 사회의 경계의 임계점을 넘나드는 집회와 그를 막아서는 공권력에 이르기까지 세상은 들끓고 있다.

모두 숨막히는 오늘로부터 탈출을 꿈꾸며, 보다 나을 것 같은 저 세상이나 이 세상의 내일을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류는 그동안의 수 많은 성현들로부터 받아 온 지혜에서 이미 모든 그 해답을 받아알고 있다. 다만 그것을 행하고 있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세상에 대한 '디스크조각모음'이나 '디스크검사'를 행하지 못하고 자신을 포맷(자살)하여 이 세상을 등지고 있고, 시스템의 호환이 안 되어 치명적에러와 인터럽트 충돌(집회)이 넘쳐나는 것은 이 사회 모든 구성원들에게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외수 씨가 TV에 출연하여 60년을 넘게 살면서 느낀 것은 이 나라 정치에 기대할 것이 없다고 회술한 적이 있다. 오륀지와 뷔즈니스 후우렌들리를 외치는 현 정부도 국회에서 경제현안도 제대로 발의하거나 처리하지 못하는 마당에 민생현안이나 사회적 성숙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것을 당장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1. 나로부터 '오늘의 행복'을 선택

'세상이 어떤식으로 변하기를 바란다면 스스로 그렇게 변하라.'는 간디의 말을 우리는 상기할 필요가 있다. 행복하게 되는 것과 행복하려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좋은 배우자, 좋은 자식농사, 좋은 노후에만 집착하여 달려가는 것은 내일의 행복을 담보로 오늘을 근저당잡혀 희생하는 것이라는 것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희생한 오늘들이 모인 다가올 내일들 역시 결국에는 희생당할 오늘이 되기 때문이다.

나중에 행복하게 되려고 하지말고 지금 당장에 행복할 필요가 있다.
'건강하다는 행복','소속되어 있다는 행복', '성취하는 것에 대한 행복' 같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에 대한 감사부터 '해결해나가고 있는 행복', '옳은 신념을 펼 수 있는 행복', '저항하며 떳떳할 수 있는 행복' 같은 과정에 대한 감사까지 우리 삶은 '살아있음에 행복한 순간들의 연속'임을 자각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동안 우리는 서로 편을 이루면서 다른 편을 욕하면서도 결국 같은 편까지 등지는 대결과 증오의 날들을 살아왔다. 질투, 시기심, 허영심, 탐욕 같은 것들은 당장의 위선들을 통한 인간관계와 사회적 제도의 연속성을 만들어 주는 듯 했지만 그것은 조그마한 충격에도 무너질 사상누각이었다.

이제 우리는 강요받고 요구당하는 삶이 아닌 자신이 주체가 되어, 스스로 자신의 삶과 순간들에 의미를 부여해가며 행복을 만들고 선택해나가는 훈련이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그림설명 : 나로부터 '오늘의 행복'을 선택하는 것에 관한 대표적 서적인 '해피어'의 출판정보>



2. 우리로부터 '오늘의 행복'을 선택

한 발짝 물러나 보면, 우리 주변은 고마운 이들과 소중한 것들 그리고 지켜주고 싶은 것들로 가득하다.
자신과 다른 것은 악으로 규정하고 사탄으로 처단하려는 것이 아닌, 자신의 존재가 중요하 듯 주위의 존재들 자체를 존중하고 한 발짝 물러나 바라 볼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

2번의 세계대전을 거치고, 냉전과 갈등의 20세기를 지나 온 21세기의 우리들은, 반드시 지켜야 할 규정과 법률에 위배되지 않는다면,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생각과 방향성을 절대선이라 믿지 않고, 다른 이는 물론 다른 집단들과 발을 맞출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뛰어난 한 사람의 열걸음'으로 이 세상을 밝히는 것이 아닌, '함께 발을 맞춘 열 사람의 한 걸음'으로 행복이 추구되어야 할 것이다. 열 사람이 한 걸음을 내 닫기 위해서는, 뛰어난 한 사람이 혼자 열걸음을 갈 때 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하여 남은 아홉사람을 챙겨주어야 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두 걸음, 세 걸음이 지나면 발을 맞춘 열 사람은, 뛰어난 한 사람이 가는 것보다 더욱 멀리 갈 수 있고, 그 길 위에서 서로가 서로들에게 동행이 되는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의 '서로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용서하세요.' 라는 말씀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오류의 함정에 빠질 우려가 있다. 무언가를 위하여 노력을 하고 고군분투하고 또 때로는 다투는 그 자체를 터부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서로 갈등하고 혹은 대립하고 공방할지라도 그 근본은 적개심이 아닌 서로를 위한다는 연대의식과 공존감이 깔려있는 경우에는 발맞춤으로 이어지고 동행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함께 공동의 이득을 추구해나가기는 하지만 '토의'와 '토론'은 분명히 다르다는 점에서도 예가 될 수 있다.

언제나 여유로울 수는 없다. 언제나 행복이 굴러올 수도 없다.
모두가 같을 수는 없다. 언제나 웃으며 말 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울고 웃으며 함께 한다는 그 자체를 소중히 여기며 '우리'라는 것에 대한 경이로움을 경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 내면에서의 갈등에서부터 보다 많은 자신들이 모인 '우리' 안에서의 어려움까지도 삶이라는 소중한 여정의 경유지임을 함께 자각해나가야 할 것이다.

행복을 선택하는 일. 그리고 그 선택을 지켜나가는 일.
그것은 우리가 지금바로 선택하고 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2009년 5월 4일 16:57 입력 <CopyRight ⓒ PowerNgine 하대현 기자>